
가장 큰 문제는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가 노파를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사실 누구라도 그 노파를 죽여야만 했을 터다. 노파는 대금업자였는데, 안톤은 대금업자라는 표현조차 과하게 겉멋이 들었다고 여겼다. 기실 그 실체는 이蝨보다도 못하지 않던가. 타인의 삶을 뜯어 먹고 사는, 금과 은 같은 금속질 허영만을 바라는 기생충에 불과하거나 그보다도 못한 존재따위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또는 다른 생명을 죽여 그 죄를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다면, 정당하게 흘린 피가 평화 가져오리라는 확신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노파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를 진정 믿고 따를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일을 머릿속에서 꺼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자들은 손꼽아 숫자 세어보기에도 부족했으므로 안톤은 위인은 다른 곳 아닌 제 내면에 숨어있노라고 믿었다.
지워지지 않아.
그리하여 지금, 수십 번을 씻어내어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을 내려다보며 안톤은 되뇌었다. 사실 안톤이 얼룩이라 생각한 자국은 얼룩 아닌 오래되어 검붉게 착색된 흉터였으므로 물 따위로 씻겨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안톤은 살갗을 파내기라도 할 것처럼, 누런 피부가 붉다 못해 보랏빛으로 보일 때까지 양손을 비벼댔다.
왜냐하면, 정말로 얼룩이 진 탓이다.
안톤은 노파의 집에서 멀어질수록 짙은 흙의 색으로 물든 혼란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째서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를 박살 내었는데도 평화는, 구원은 찾아오지 않는가? 왜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뛰어대고 속이 뒤집힐 것만 같은 구토감이 치미는가?
안톤은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았으나 하늘에 대고 맹세컨데 안톤이 그 이상하고 불온한 생각을 실행으로 옮길 결심을 한 순간부터 노파로부터 갈취한 저당물과 지갑 따위를 내용물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어느 돌 아래 파묻어버린 때까지의 모든 시간과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안톤은 언젠가 자신에게 내려질 형벌을 감내해야만 할 것임을 알았으며 심지어는 그를 끌어안고 저물 것까지도 다짐했다. 다만 우매하고 선량한 이들이 그 죄가 고귀한 죄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쉬이 답할 수 없었다. 나는, 안톤 파블로비치는 그들을 대표한 자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시간이 필요했다. 죄의 값을 매기기 전 안톤 파블로비치의 당위를 찾을 수 있을 시간이, 유예가. 그리고 안톤은 자리가 빈 이름을 하나 알고 있었다. 살인 따위는 저지른 적 없는 선량한 일꾼, 키퍼 슈미트라는 가면을.
안톤은, 키퍼 슈미트의 가죽을 뒤집어쓴 돌멩이는 부랑자처럼 거리를 떠돌았다. 적어도 이 거리의 사람들은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를 알지 못했으므로 안톤은 이곳에서만큼은 안톤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안톤은 순간 불안에 사로잡혔다. 이 불안은 일종의 고질병이었는데, 안톤은 길을 찾는 행인이 자신이 위치한 곳을 보고 있기라도 하는가 싶으면 만인의 눈깔이 제게 집중되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시선이 키퍼 슈미트라는 가죽만이 아닌 그 안에 숨어든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까지 미치는 것이다.
누군가가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파헤치려 든다!
안톤은 뱃속이 들끓는 것만 같았다. 이어 신물이 역류해 목구멍을 타고 올랐다. 익숙한 감각이다, 구토다. 안톤은 가죽제 장갑을 낀 손으로 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운 좋게도 교량 위를 지나던 중이었으며 바로 좌측에 샛길로 하여금 둑이 무너진 강가까지도 내려갈 수 있었으므로 그 길을 걷기를 택했다.
경사로 아래로부터 바람을 타고 알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렸다. 언뜻 듣자면 말소리 아닌 휘파람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안톤이 완전히 물 앞으로 내렸을 때 그 소리가 다름 아닌 이국의 언어로 된 노랫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교량 아래 그림자 진 곳에 사람 한 명이 몸을 숨겨두고 손을 씻고 있었다. 왜소한 몸에 맞지 않는 널널하고 칙칙한 드레스가 인영을 부풀렸다. 그와 대조적으로 원색의 실로 화려한 문양을 박아 넣은 푸른 숄이 펑퍼짐한 자락 위로 늘어졌다. 그 숄이 흔들리며 희고 또 옥색인 머리카락이 흘러 발치까지 떨어졌다. 안톤은 그가 샤르 갈빙가임을 알았다.
샤르 갈빙가는 이방인이었다. 갈빙가는 유명 인사라기에는 은둔하였으며 그렇다고 은둔자라기에는 그가 착실히 삶을 이어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이가 드물었다. 갈빙가는 캬흐타 땅 너머로부터 왔다. 핏줄을 증명할 성姓이 중요치 않은 집단에서 말을 몰고 양을 치는, 산짐승을 잡아 태양에 혼을 달래며 살아가는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머리카락 끄트머리의 색처럼 녹색 순이 가득한 들판이 저물고 맨발로 디딜 땅이 사라져 가며 짐승의 자리 대신 사람과 가공품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언젠가 태양이 저희가 옮겨갈 곳을 비추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또한 흐름이라고 가장 나이 많아 지혜로운 이가 말했다. 모두가 수긍했으나 단 한 명만이 수긍하지 못했다. 그들이 샤르긴 갈빙가가 개중 가장 어린 자이며, 감히 태양을 쳐다보고도 고개 숙이지 않을 패기와 유약한 자신감을, 꿈을 뽐내보려던 이라는 사실을 간과했기에 갈빙가는 눈 깜빡할 새에 누구도 알지 못하게 국경을 넘었다. 사람 사이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배울 것을 배우고, 말과 양과 풀이 없더라도 목 축일 물과 배 채울 빵과 고기가 충분할 날을 꿈꿨다. 다만 땅에 끄적인 문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에게 어떤 기회 있겠는가? 갈빙가는 모래와 돌로 이루어진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가족은커녕 제 배 하나 채우기 어려워 바삐 품을 팔았다. 그러자면 때때로 먼 곳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치밀었다. 풀과 흙으로 이루어져 생기 넘치는 색채가 짙은 땅을 밟는 감각이 그리웠다. 짓이겨진 풀과 새벽녘 이슬이 한데 섞여 나는 향이 이토록 소중했다는 사실을 잊음이 후회스러웠다. 우울감이 극에 달했을 때 갈빙가는 그를 토해내는 대신 신발을 벗었다. 맨발에 닿는 돌의 감각이 무엇보다도 시렸으나 그조차 느낄 수 없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안톤은 오래도록 갈빙가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아니, 노랫소리에 귀를 빼앗긴 것일지도 몰랐다. 직감이 뛰어나지 않은 이라도 바라지 않은 간섭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흘렀다. 갈빙가는 곁눈질로 안톤을 보았다. 손에 남은 물기를 털어내고 흘러내린 것들을 바삐 정리하고는 평소처럼 숄을 싸매 자리를 떴다. 그 걸음에 안톤이 자연히 이끌렸다. 안톤은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애당초 이유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으나 꼭 그를 따라가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둘 사이에 겨우 열 걸음 남짓의 거리가 있었다. 갈빙가는 안톤이 저를 추적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었으나 달리 도망하거나 맞서지 않았다. 대신 미지의 불안에 간혹 몸을 파르르 떨거나 어깨 너머를 힐끔거릴 뿐이었다.
물길 흐르는 방향을 따라 운하로 내려가면 갈빙가가 세를 들어 사는 집이 있었다. 갈빙가는 층계를 올라 제 방에 들어서면서도 문을 굳게 닫지는 않았다. 저를 뒤따르던 이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반 뼘 손이 들어갈 틈을 두었다. 안톤이 그 틈에 손을 걸쳐 문을 열었다.
저를 찾아오셨어요?
맞아요. …아니, 사실 아니에요.
안톤이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갈빙가는 반쯤 녹아내린 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단칸으로 된 방은 눈에 띄게 천장이 낮았다. 창문이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건너편 건물 벽을 향해 난 것이라 빛이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방의 주인이 지독한 향수를 앓고 있었으므로 벽에는 이름 모를 마른 풀들이 걸려 있었다. 천장에 둥글게 마모된 유리가 매달려 있었으며 침대 옆에는 커튼 대신 이어 붙인 천 조각이 붙어 있었다. 들어왔으나 빠져나가지 못한 물기 눅눅한 냄새가 방에 깃들어 있었으나 달리 곰팡이 따위가 피지는 않아 기묘한 안정감이 드는 방이었다. 이는 곧 그 자체로 낡았으며 또한 착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갈빙가는 촛대를 낡은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항상 하던 대로 그 옆에 머리를 감싼 숄을 내려두려 손을 옮겼으나 문득 방 안에 들어온 타인을 의식했다. 보잘것없는 자신을 내보이는 일이 민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되려 숄을 더 단단히 당겨 잠궜다.
방 안을 둘러보고 의자에 앉는 모양새를 보건대 갈빙가는 안톤이 제게 일을 주거나 단순히 저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안톤은 갈빙가를 알고 있을지언정 갈빙가는 안톤을, 그 이름조차도 알지 못했으므로.
걱정 말아요. 내가 다시 그쪽을 찾을 일은 없을지도 모르니까.
공기에 어린 긴장감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안톤은 퍽 상냥한 투로 말했다. 키퍼 슈미트라며 자신을 소개하는 말에 갈빙가의 굳은 표정이 누그러졌다. 이국적인 이름에 이방의 동질감을 느낀 탓일지도 몰랐다.
계속 서 있을 거예요? 앉아서 얘기해요.
안톤은 그곳이 꼭 제 방이라도 되는 양 촛불을 사이에 둔 자리를 가리켰다. 그러면 갈빙가가 머뭇거리면서도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 산 지는 오래되었어요? 가족도 없이 혼자서.
네…. 오래되었어요. 아니, 이곳에서 나고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그다지 오래되진 않았겠지만요.
원래 살던 곳은 어디인데요?
이 땅의 끝을 건너야 해요. 푸른 들과 벌판이 있던 곳에요. 이제 사냥감은 그리 많지 않지만, 굶주려도 누군들 얼굴 찌푸리지 않는 땅이 있어요….
갈빙가는 신이 난 듯이 말하다가도 점차 숨길 수 없는 침울을 얼굴에 드러냈다. 안톤은 얼마간 갈빙가를 보았다. 숄로 뒤덮은 얇은 머리카락을, 손을, 특히 아무것도 신지 않아 푸르게 질린 발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고향으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이에요?
…돌아가지 않아요.
아니, 돌아갈 수 없어요…. 말이 끝을 향할수록 점차 꺼졌다. 양손을 겹쳐 허공을 더듬거리는 모양새가 가슴이 꽉 틀어막혀 차마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는 말이 있는 듯했다. 구태여 닦달할 일은 아니었으므로 안톤은 그저 기다리기로 했다.
…제가 주제를 모른 탓에요. 흙과 풀을 밟지 않아도 쓸 수 있을 것들을 익혀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떠났는데도…. 고작 이런 모습이지 않나요, 저는.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얼굴이 홧홧해졌으므로 갈빙가는 구태여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건 키퍼 혼자 간직해주세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요?
나라면 그 부끄러움조차 부끄러울 거예요. 안톤은 혀를 차며 말했다. 형체도 없는 말이 꼭 날카롭게 갈린 얼음송곳 같아 가슴 한 켠이 아렸다. 갈빙가는 아무 대답 않은 채 입을 수 번 뻐끔거렸다. 일순 침울과 원망을 담은 표정이 안톤을 향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 사이가 움푹 팼다. 이어 두 눈에 물기가 차올라 고개를 숙였다. 안톤은 그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았다. 그 방에, 샤르 갈빙가 자체에 깃든 이질감이 안톤의 뇌리에 박혔다. 숄 너머로 가린 피부 위에 투명한 액체가 맺힌 것을 보았을 때 안톤은 갈빙가가 온전한 혼자임을, 그리고 단신으로 아무 보답 없을 헌신을 행하면서도 이어 타인의 고통까지도 끌어안아 감내하려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측은지심이 그를 움직였을지도 몰랐다. 안톤은 갈빙가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물과 바람에 식어 여즉 차가운 발을 한 손으로 잡아 들었다. 빈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러나 하나하나 살펴보거든 조잡하기 짝이 없는 장신구들이 발목에 한 데 달려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톤은 고개를 숙여 그 발등에 입을 맞췄다. 갈빙가는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물리려 했으나 아직 안톤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으므로 파르르 떨고 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나 같은 사람한테.
나는 온 인류의 고통 앞에 머리 숙인 거예요.
안톤은 개의치 않다는 듯이 제 할 말만을 했다. 그리고 작은 무릎에 이마를 댄 채로 고해라도 하듯 고개 숙여 눈을 감았다.
나를 원래 이루고 있던 작자는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라는 작자예요. 무서운, 깊은, 그러나 해내지 않았다면 그 또한 죄가 되었을 죄악을 저지르고도 그를 감당하지 못해 존재를 지운 파렴치한 작자지….
하지만 당신은 키퍼 슈미트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위에 또 하나의 인두겁을 씌운 거예요, 샤르. 아무 잘못 없는, 순수하고 우매하고 또 신실한 사람의 이름을 멋대로 빼앗아서!
말이 비명처럼 새어 나왔다. 다시금 구토감이 치밀었으므로 안톤은 목 안으로부터 긁는 소리를 냈다. 갈빙가는 머뭇거리다가 제 무릎 위에 놓인 손 위에 제 것을 겹쳐 올렸다.
저는 안톤이 처음 저지른 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지만. 후회하나요, 자기 자신까지도 해치는 죄악을 저지를 만큼?
갈빙가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고작 오늘 처음 본 자에게, 심지어는 보잘것없는 나뭇잎 따위에 불과한 자에게 비명 하듯 죄를 고했으므로 안톤 또한 꼭 자신 만큼의 고독을 지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갈빙가는 속삭이듯 고요하게 말했다. 죄를 또 다른 죄로 덮어서는 안 돼요….
그건 또 다른 죄를 불러올 테고, 결국 누구에게든 불행만을 가져올 테니까요. 사람들이 진정 바라는 평화나 의로운 세상 따위가 찾아올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그런 세상이 오려면, 모두가 속죄하고 또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 깊이 숨겨둔 마음을 세상에 고백할 줄을 알아야 해요.
그런 말을 듣자 안톤은 새로운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토록 추한 감정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진리이고 또 자연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은 결국 그저 범인에 지나지 않은 것 아닌가…. 안톤은 반박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장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불안과 괴로움 어린 시선과 마주쳤다. 목전까지 치밀어 올랐던 음성이 공기 중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안톤은 쉬이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명한 사랑. 조건도 제한도 없는 분명한 사랑이 그곳에 커다란 날개의 형상을 하고 자신을 품고 있었다.
제가 미리 당신을 알아 만났다면, 스스로를 죽이고 다른 이의 이름으로 살아갈 결심을 할 때에라도 알았다면, 어느 때든 죄지을 일을 말렸을 거예요. 그러지 못해 안타까워요. 그러지 못한 게…. …죄송스러워요.
갈빙가는 자신이 지금껏 견뎌 온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꼭 그런 시간이 당신의 것 같기도 하다며 말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안톤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어떠한 색채를 가졌는지 깨달았다. 그것이 폭풍우 치는 날의 바닷물처럼 소용돌이치며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라는 존재를 감쌌다. 완전히 죽어 녹아들지 못한 채 지저에 숨죽이고 있던 존재가 몸을 일으키며 대리석을 부수는 파열음을 냈다.
젠장, 그쪽이 왜 미안해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참 침묵이 찾아들었다. 차가운 방은 온기 되어줄 것이라고는 서로 혹은 바닥을 드러내 곧 꺼질 듯 위태로운 촛불뿐이었으므로 그들은 누가 보아도 처량한 꼴을 하고 있었다. 안톤은 갈빙가의 얼굴을 살폈다. 고통과 애정이 섞여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된 것이 그를 덮고 있었다. 안톤은 조심스럽게 숄을 벗겨내었다.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괴롭다. 그리고 살을 갈라 안톤이라는 존재를 드러내었음이, 일련의 모든 일이 사랑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가장 불행하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갈빙가 또한 별반 다르진 않으리라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갈빙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래 고민하지 않은 말이 샜다. 우리, 우리…. 조율되지 않은 악기를 아무렇게나 연주하듯 같은 단어가 수 번 맴돌았다.
우리…. 날이 밝으면 이곳에서 나가요. 네거리에 나서 대지에 입을 맞추고, 세상을 향해 지은 죄를 고백해요.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속죄하는 거예요. 진정 준비가 되었다면 누구든 안톤을 용서할 거예요. 끝내는 안톤 자신도 안톤을 용서하게 되겠죠….
그렇게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철자 하나하나에 전부 떨림이 있었으므로 말하는 꼴이 처절하기까지 했다. 안톤은 진정 속죄함의 의미도 속죄로 하여금 스스로를 용서해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으나 차마 그 처절함 앞에 그럴 수는 없노라고 선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날이 밝으면, 네거리에서…. 수 번 반복해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갈빙가가 그래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날이 밝고 또 저물며 푸르던 하늘에 황혼이 깃들었다. 자수를 결심한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이 짙었다. 안톤은 그 무게를 덜기 위해서라도 갈빙가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갈빙가 또한 안톤을 기다렸다. 힘겹게 결심한 일이 거품처럼 흩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갈빙가는 절망에 휩싸였다. 곧 해가 진다. 빛이 사라지거든 안톤 또한 어둠에 삼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갈빙가는 급기야 방을 나서서 안톤을 직접 찾아보려 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문고리를 잡은 순간에 안톤이 문을 열었다. 갈빙가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샤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한숨이 섞였다. 안톤의 얼굴에는 갈빙가가 보인 것 이상의 불안과 고통이, 원망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다만 안톤이라는 존재를 일깨운 자에 대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마지막으로 축복을 해줬으면 해요. 빌어먹을 신 따위를 대신해서, 그쪽이 해주었으면 해.
그러면 갈빙가는 안톤의 두 손을 붙잡고 저만이 알고 있는 오래된 이국의 언어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안톤은 히죽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자수하러 갈 거예요, 그쪽이 말한 대로 네거리에 나가 땅에 입 맞추고 온 세상에 내 죄를 떠벌리겠죠. 꼭 그럴 거예요…. 그걸 그쪽이 알고 있으라 말하려고 찾아왔어요. 나는 이제 감옥에 갈 거예요. 그쪽이 말한 대로 속죄를 행하면, 그쪽이 바란 바가 드디어 이루어지는 거죠.
안톤은 되는 대로 지껄이고는 손을 물렸다. 곧장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갔다. 갈빙가는 숄을 던지듯 걸쳐 뒤집어쓰고 바삐 안톤을 따라나섰다.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말아요!
안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짜증 섞인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갈빙가는 놀라 몸을 파득 떨고는 방 한가운데 서서 열린 문틈으로 안톤을 바라보기만 했다. 손을 물린 이래로 가슴이 계속해 두방망이질 쳤으나 한 번 뒤돌아보기라도 하면 영영 도망쳐야 할 것만 같았으므로 안톤은 그저 앞을, 앞만을 향했다.
안톤은 내내 사람 하나 없는 땅굴로 뛰어 들어가고만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그 대신 걷고, 또 걸었다. 경찰서는 우측 코너를 돌아 반 블록을 더 가면 있었고, 그 대신 앞을 향하면 교량과 인적 드문 창고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안톤은 때때로 교량 아래 흐르는 물길을 내려다보거나 버려진 창고 문을 신발코로 건드리기도 하며 끝나지 않는 길을 뱅 돌았다. 똑같은 갈림길을 마주한 지가 이제 세 번째였으며 여전히 경찰서에 걸음 닿기까지는 반 블록이 남아있었다.
해가 지평선에 닿아 고개를 다음 날로 넘기려 들었다. 안톤은 작은 깃털이 코에 와닿아 간질이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털어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낮추고 자신을 뒤따르고 있던 갈빙가를 발견했다. 문득 축복해 주기를 바란다며 찾아가 놓고도 저와 함께 걸으려 드는 일에는 개처럼 뿌리친 것이 자신의 추함과 비열함을 날 것 그대로 드러냄과 다름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해졌다. 안톤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는 오늘 한 번도 들어서지 않은 골목을 갈지자로 횡단했다. 그러면서도 갈빙가가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아니, 이제 영원히, 자신이 어딜 향하든 따라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자 도달해야만 할 목적지가 선명해졌다. 안톤은 층계를 올랐다. 쓰레기와 숯 조각과 서류의 모서리를 찢어둔 듯한 종이 나부랭이 따위가 걸음을 역행해 나뒹굴었다. 간혹 열린 문 안쪽에서 여름 바다의 악취가 새어 나오는 듯도 했다. 안톤은 그것이 꼭 자신의 체취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끝내 안톤이 문고리를 잡았다. 평복을 입고 바삐 무언가를 적어 내리던 이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키퍼 슈미트를, 혹은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를 아는 이들이….
내가 했습니다.
아마 그 말을 꺼내는 데까지 일각도 더 걸렸을 것이다. 안톤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내가 했습니다. 내가,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가 그 노파를 죽이고 금품을 강탈했어요.
그들은 시베리아로 떠났다. 페테르부르크보다도 차갑고 광막한, 얼어붙은 땅에 있는 도시, 그 안 유형수를 가둔 요새로. 안톤은 냉랭한 땅을 밟을 때까지도 자신이 속죄하고 용서를 받는 일이 어떤 의미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되려 그런 마음가짐이 관대한 판결을 이끌었다. 그러므로 여덟 해의, 안톤의 표현을 빌려서는 고작 여덟 해의 형벌이 안톤을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갈빙가는 판결이 내린 순간부터 떠날 채비를 했다. 오래도록 모으고 만든 장식물과 장신구와 자수 새긴 천을 치우거나 팔고, 푸른 숄을 두르고, 작은 손가방에 반짇고리나 세 들어 사는 동안 피워내지 못한 장미꽃 씨앗 따위를 집어넣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갈빙가는 착실히 안톤의 면회를 다녔다. 안톤은 이전보다도 깊은 혐오감에 빠진 데다가 내면을 겉면으로 성숙하게 내비치는 법 알지 못했으므로 간혹 갈빙가를 비난하기라도 하듯 묻기도 했다.
가족이 있는데도 지금보다도 먼 땅으로 정말 떠나려고요?
갈빙가는 그런 물음을 들을 때마다 침묵하고는 했으나 하루는 그 특유의 우울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보탰다.
하지만 안톤은 영영 혼자이지 않나요.
그래서 안톤은 그처럼 못되게 묻는 말을 하기를 그만두었다. 다만 아무 희망도, 아무런 기대도 품지 않은 채 언제까지 갈빙가가 자신을 위할지를 보고자 했다.
유형 생활은 좋게 말해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달리 절망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때때로 웃었고 또 울었으며 갈빙가가 앓아누운 탓에 면회를 놓치기라도 하는 때에는 서로를 끝없이 그리기도 했다. 다만 한 가지, 가장 다행스러운 점은 갈빙가가 지닌 희망을 믿고 바라는 마음이 언제든 변치 않고 굳건했다는 것이다. 갈빙가는 인간의 고독을 알았으며, 길고 시린 운명과의 사투에 타인의 존재가 필요함을 알았으므로 그들이 서로의 곁에 자리하는 한 언젠가 손을 맞잡고 승전고를 울릴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하여 둘은 시련을 이겨내거나 고통을 깊이 묻어둔 채 외면하며 돌아오는 매 계절을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은 바람 같았으며 때때로 고여 정체된 물길 같기도 했다. 계절답지 않은 계절들이 각기 여덟 번 지났다. 갈빙가는 언제나와는 다르게 숄을 걷어 맨얼굴을 온전히 드러냈다. 한 손에 수수하게 핀 푸른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안톤이 제 앞까지 걸어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자유를 얻은 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갈빙가는 빈손을 그에게 뻗었다. 갈빙가는 늘 안톤에게 손을 내밀 때마다 수 번을 머뭇거리고는 했는데, 첫째는 안톤이 자신을 언제든 뿌리치고 떠나갈 수 있으리라는 확신 같은 불안 탓이었으며 둘째는 내밀어 붙잡은 손의 의미가 꼭 저와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았으리라는, 마찬가지로 확신에 가까운 체념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갈빙가는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맞잡은 손 또한 한 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눈과 눈을 마주하였을 때 그들은 서로의 마음이, 상이한 단어로 표현되었던 것이 실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한없이 깊고 영원할 사랑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안톤과 갈빙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들은 웃었고, 또 울었다. 고작 한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을, 동시에 오직 한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감정을 온몸으로 느꼈다. 누구도 그 복잡을 그 둘이 함께 느낀 것 외의 다른 말로 감히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맞닿은 품 안에 초라하게 피어난 푸른 장미꽃이 환히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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