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2

24. 파도가 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내가 리시리섬으로 향했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본가에서 쫓겨나 계절이 여러 번 지나도록 홋카이도의 별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압박이 심했을 때는 몇 달이나 갇혀 문틈에 앉은 작은 새나 고양이를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다. 도쿄에서 온 아가씨가 방 안에 갇혀 엄격한 신부 수업을 받거나, 고리타분한 별장의 주인이자 사촌 되는 이과 식사마다 매번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하인들도 측은지심을 갖기 마련이었다. 오지랖이 넓은 하인은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몰래 별장 밖의 세상을 안내해 주곤 했다. 처음 별장 밖에 발을 내디뎠을 때 보았던 것은, 리시리산―당시에는 섬이 아니라 산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다.―이었다.     계절에 따라 색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리시리섬을 바라보는 게 삶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창 너머로..

세계명작전집 2024.11.17

22. 당신은 나를 운명론자가 되게 한다.

1미시감 未視感명사 1. 심리 기억 오류의 하나.지금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느낀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분명 처음 겪는 상황이고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감정을 느낀다거나, 정반대로 자주 겪는 상황임에도 처음 보는 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는 경우 말이다. 명경은 대체로 둘 다 자주 경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제 얼굴이 낯설다고 느끼는 게 몹시 낯설었다.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런 표정이 아니라, 다른 표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심코 손을 뻗어 거울 위를 어루만졌다가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마저 낯설었다.   그래, 낯설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저를 뒤에서 끌어안는 그의 체온이며 체향은 전혀 ..

세계명작전집 2024.11.17

15. 죄와 벌

가장 큰 문제는 안톤 파블로비치 페트로브가 노파를 살해했다는 사실이다. 아니, 사실 누구라도 그 노파를 죽여야만 했을 터다. 노파는 대금업자였는데, 안톤은 대금업자라는 표현조차 과하게 겉멋이 들었다고 여겼다. 기실 그 실체는 이蝨보다도 못하지 않던가. 타인의 삶을 뜯어 먹고 사는, 금과 은 같은 금속질 허영만을 바라는 기생충에 불과하거나 그보다도 못한 존재따위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또는 다른 생명을 죽여 그 죄를 온전히 끌어안을 수 있다면, 정당하게 흘린 피가 평화 가져오리라는 확신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노파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를 진정 믿고 따를 수 있는 인간이 세상에 얼마나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일을 머릿속에서 꺼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자들은 손꼽아 숫자 세어..

세계명작전집 2024.11.17

4. 붉은 머리의 여인

딸을 가진 귀족 가문의 부모라면 으레 명망이 높으며 상당한 재산이 있는, 더하여 매너까지 좋은 미혼의 남자와 딸이 아름다운 사랑 끝에 결혼하기를 바란다. 크리스티나는 제 부모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만류하고 싶지도 않았다.물론 제 눈앞에 남자들을 은근슬쩍 들이미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지만.    그러니까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상황 같은 것들 말이다. 분명 5분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티나는 파티장의 한쪽 벽에 기대어 선 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한 손에는 도수가 낮은 과일주가 든 잔을 들고, 아름답고 화려한 드레스의 향연을 그저 구경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마저도 부모님이 이번 파티에서는 꼭 3시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했기 때문이고. 그런데..

세계명작전집 2024.11.17

16. AA

플로리다 태생의 천진하고 해맑은 소녀, 온갖 사랑과 원조를 받고 곱게 자란 사업가 집안의 막내딸, 그리고 이러쿵저러쿵한 사연과 조금(?)의 썸타는 기간을 거쳐 어쨌거나 지금은 따끈말랑 귀여운 제 여자친구가 된 아리아 허니셋과 여름휴가를 떠나기로 했을 때. 처음부터 아도라 빈은 반드시 백 명을 데려다 두면 아흔일곱 명은 무난하게 기뻐할 예쁘고 반짝반짝한 관광지부터 구글링하기로 마음먹었다.꽤나 사랑의 힘에 기인한 결정이었다. 아도라는 본인의 우수한 사교술과 빠른 눈치로 교내 권력자들의 비위를 살살 맞춰주며 지낸 것과 별개로, 얼빠지고 멍청한 낯짝의 사람들이 우글대는 장소를 영 좋아해 본 역사가 없었다. 바닷가에 놀러 간답시고 먹지도 못하는 해수를 뇌세척에 양보할 필요는 꼭 없을 텐데, 종종 어떤 얼간이들은 ..

SUMMER ON YOU 2024.08.17

14. 가르시아

“이것을 보고 자랐겠군.” 거대한 예수상의 발치에 도달한 기예르모가 말했다. 크리스가 기예르모의 곁으로 걸어왔다. 확실히 그랬지. 크리스는 생각했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예수상이 있는 곳에 오르기에 그는 낮은 곳에서 해야 하는 일이 많았다. 대신 그는 기진해질 때면 고개를 들었다. 흐리고 번개가 치는 날이더라도 눈썹뼈에 손날로 차양을 치면 이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크리스는 마치 진통제를 삼키는 것처럼 등 돌린 석상을 시선으로 삼키곤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독한 피로에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마냥….  두 팔을 벌리고 있는 예수상의 얼굴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는 눈이 닿는 부촌만을 굽어살핀다고 누군가는 비아냥거렸다. 틀렸다. 부유한 자들이 예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그 등 뒤편의 ..

SUMMER ON YOU 2024.08.17

7. 64B8

신록    해변에 죽은 해파리가 떠밀려와 있었다. 루덴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이고 파도가 해파리의 말랑말랑한 갓과 다리를 스치고 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사울이 다가와 허리를 숙여 물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한참이고 조용히. 얼마나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루덴의 얼굴은 햇빛에 약간 익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드러난 팔과 목덜미의 피부가 홧홧해 보였다.“덥지 않아?”사울 노이드는 제 몸과 손으로 루덴의 머리 위에 그림자 드리워 주며 물었다. 무심하게 햇빛이 비치는 자리에 나무처럼 서서, 마치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루덴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굳이 짚어주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오래 물가에 앉아 있던 탓에 치맛자락이 온통 바닷물로 젖어,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나갈 때마다 그 물..

SUMMER ON YOU 2024.08.17

21. 뭍과 물

덜컹, 덜커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차는 출발한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간다. 손에 쥔 전시회 티켓에선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오랜만에 맡음에도 단 순간도 잊은 적 없는 향기였다. 연담淵潭에서부터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바다로.  당신이 있을 바다로, 네가 찾아올 바다로, 우리가 만났던 바다로….   내딛는 걸음에 두려움이란 없고, 기다리는 시간에 불안함이란 없다. 이 모든 길이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걷기 위함이었다면, 지금 멀리 돌아가는 것 정도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 여정의 끝에 서로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 • ❁⎈ • • •  『친애하는, 나의 후회.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 그동안 잘 지냈을지 모르겠네. …그도 그럴게, 너무 오랜만이..

The Blue 2024.06.06

20. 수묵

파도가 일렁인다. 모래사장에 부딪히며 떠오르는 색채는 햇살을 담은 금빛을 안았다가 금세 바래지고, 서늘한 푸른빛을 띤 채로 평온한 굴곡을 만들어낸다. 드넓은 대양은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덧없는 무력감을 수반하는데. 밤하늘이 내려앉을 때면 죽음이 가득한 사해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그 모습이나 상징은 무궁무진해서. 동시에 한 움큼 잡아봤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불확실한 형태가 두려워서. 차마 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틀에 담을 수 없는 것. 죽음과 같이 언제 사람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는 것. 켄타는 잴 수 없는 환경을 무척이나 꺼려하고 경계했다.  아무리 미운 자라 하더라도 그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리라.  철썩이는 물결의 모양새를 눈앞에서..

The Blue 2024.06.06

16. ID

외딴 별장에는 파도가 모래알을 긁고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우거진 숲을 휘갈기는 손길과는 달랐다. 얕게 얼어붙은 호수의 파열음과도 같지 않았다. 주인 내외가 찾지 않으면 최소 인원만 남아 관리했기에 인간이 자행하는 일이라 여길 수도 없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원래는 이런 소리가 나지 않았노라 하였으나 며칠 되지 않는 사이 일을 그만두어 알 수 없었다.   별장은 계절에 따라 찾는 휴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저택이 되었다. 주인은 오래전 출가해 소식 하나 전하지 않던 매정한 도련님이었다. 얼굴 반쪽에 붕대를 매고 다리 하나를 절며 돌아온 이는 푸석한 피부에 퀭한 눈을 한 채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택에서 익숙한 점을 발견했을 때면 인상을 찌푸리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피곤하고 지쳐 ..

The Blue 202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