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가 일렁인다. 모래사장에 부딪히며 떠오르는 색채는 햇살을 담은 금빛을 안았다가 금세 바래지고, 서늘한 푸른빛을 띤 채로 평온한 굴곡을 만들어낸다. 드넓은 대양은 무한한 가능성과 동시에 덧없는 무력감을 수반하는데. 밤하늘이 내려앉을 때면 죽음이 가득한 사해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그 모습이나 상징은 무궁무진해서. 동시에 한 움큼 잡아봤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불확실한 형태가 두려워서. 차마 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틀에 담을 수 없는 것. 죽음과 같이 언제 사람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는 것. 켄타는 잴 수 없는 환경을 무척이나 꺼려하고 경계했다. 아무리 미운 자라 하더라도 그 구렁텅이에 몰아넣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먼 존재리라.
철썩이는 물결의 모양새를 눈앞에서 지켜보던 블랙의 손목을 충동적으로 잡아챈 이유도 여기에 존재했다.
언제나 켄타는 뒤에 있었다. 지루하고도 평온한 교실 내에서도, 이계의 문을 닫기 위해 여정을 떠났을 때도, 아무리 가까운 자라 하더라도 그들의 옆에 서지 못하고 뒤에서 그들을 주시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무언가를 도전하기엔 글러먹은 성정이기에. 용기라거나 무모라는 단어는 바스러진 표현이나 다름없었고. 두려워 떨며 모든 것에 이질감과 분노, 그리고 포기를 담고 살아갔으나. 죽음 앞에서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목숨을 잃기 싫어서? 아니. 그런 장대한 포부보다는 진득한 사해의 수마에 상대가 빠져들지 않길 바라서였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스스로를 위하여.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겉으로 드러난 적이 없었으니. 갑작스레 잡아챈 소매에 블랙이 휘청거리는 모습은 뜬금없다 여겨질지 몰라도, 켄타에게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하나의 파노라마에 가까웠다.
하지만 하나 간과한 점은, 블랙은 켄타와 달리 죽음에 완전히 몸담은 점이 있었다는 얘기일까.
[ ...켄? ]
[ … ]
[ 무슨 일이길래 그래. 안 좋은 거라도 봤어? ]
귀에 박히는 낮고 부드러우며 다정한 목소리는 켄타의 심기를 자극했다. 그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구하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에도 블랙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그 누구보다도 진심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충분히 당황스러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블랙은 켄타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켄타는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게 일상인 녀석임과 동시에, 지금처럼 무언가에 짓눌려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짓이겨진 줄기 같은 친구였으니. 미워하면서도 죽지 않길 바란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소매를 잡은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며 블랙은 생각했다. 잡을 수 있다면 잡아주고 싶은데.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음에도 찰나의 고민은 거둬지지 않았다. 평범한 친구라고 하기엔, 겪은 것이 질릴 정도로 많지 않나.
그 경험 덕분에 켄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도. 비록 켄타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둘의 시선이 마주하진 않았지만, 서로의 목소리만으로도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서로의 무른 부분을 알고 있기에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서도. 평범한 친구마냥 가볍게 말을 꺼낼 수는 없는 입장이니. 그런 나머지 블랙에게는 끝없이 이어지는 인내가, 켄타에게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짓말 같은 현실이 존재했다. 이미 인지했으면서도 느껴지는 어색함이란 어찌할 수 없었다. 한 번 갈라진 틈은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테니.
[ 블랙, ... ...나는. ]
[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
[ 하나도 안 괜찮거든. ]
[ 아까 전시회에서 봤었던 그림, 기억나? ]
과거에 겪었던 순간,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은 힘겨운 악몽. 그 상황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지만, 비슷한 현상을 인지하자마자 아래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끔찍하고도 익숙한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재현된다. 저주에 가까운 능력을 받고 태어난 자라면 한 번은 겪었을 그 최악의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인적이 드물다 못해 사람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전시회 내에서 봤던 작품은 시야에 스치자마자 뇌리에 박힐 정도였다. 단순히 키사라기 켄타만 그런 게 아니라. 지그문트 블랙도 마찬가지로.
까만 먹칠이 반복되어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흩뿌려져 있었으며. 그에 닿는 순간 눅눅한 늪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흑과 백의 조화는 집중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금빛 액자라는 틀 안에 박힌 그림이었지만. 흩날리는 검은 파도는 금방이라도 두 명의 관람객을 덮칠 정도로 경계가 흐릿했고,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난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난장인 결과물이란. 그를 마주한 두 명에게서 잊고 싶어 하는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충분하고도 남았으니.
온 세상이 흑백으로만 보이고, 손끝에서 흐르는 까마득한 줄기는 징그러운 독을 잔뜩 머금은 채로 나왔던 시절.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이 참혹한 현실의 마침표를 찍어줄 붓은 어디 있는지 헤맸던 것이 머릿속으로 하나둘씩 파고들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혈흔은 시간이 흐르면 말라붙지만, 깊게 남은 흉터는 누를수록 고통스러울 뿐. 작품을 마주하는 건 그와 마찬가지였다. 역겨워서 토악질이 목 끝까지 타고 올라오는 기분.
거친 숨을 겨우 갈무리하며 도망치듯 전시회를 빠져나온 켄타와 달리, 블랙은 차분한 낯으로 다음 행선지를 입에 담았다. 모든 감정과 표정을 관장하는 포커페이스에서는 거리가 멀었지만, 여전히 블랙은 제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 있어 지나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행복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도 예전에 비하면 무뎌졌고, 슬픔과 불행을 나누는 건 최대한 피하고 싶었으니까. 특히 상대가 켄타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남들의 과거에 짜증을 잘 내서 그런 게 아니라, 사이가 틀어진 지금도 블랙이 표정을 숨기기 위해 말을 돌리는 것을 기피했으니. 무엇보다도 블랙은 켄타가 가장 꺼려하는 것과 가깝게 맞닿아 있었으니까.
서로가 떠올린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건. 지금 같은 관계보다 나은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서로를 위하는 것, 서로를 배려해 주는 것, 서로를 생각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아킬레스건을 누르는 비수에 가까울 텐데.
손목에 닿은 온기가 퍽 차갑다. 새벽에 가까워진 시간 때문이리라.
[ … ]
[ … ]
[ 어, 기억난다. 뭐였더라. 기이했다는 것만 떠오르는구만. ]
식은땀을 흐르던 얼굴이 여상스러운 색채를 띠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리끼는 표정으로 손을 놓으려던 켄타는 고개를 들어 블랙을 보려다 말았다.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을 제 손으로 놓치는 것만으로도 몇 번째더라. 젠장, 속으로 욕을 지껄이며 느리게 거두려던 찰나에.
[ 사해. 죽음의 바다였어. ]
[ 그래, 그거. …늦었다. 블랙. 돌아가자. ]
[ 그 그림에 담긴 뜻이 뭔지 알아? ]
[ 알 게 뭐야. 보나 마나 물감이 많이 요구되니까 그리지 말라는 뜻이겠지. ]
손끝에 희미하게 스치는 블랙의 온기에서 등을 돌려서 돌아가면 될 것을. 투덜거리면서도 켄타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인지, 아니면 두려움이 켄타의 발을 얼어붙게 만든 것인지.
[ 블랙, 말하지 마라. 대충 무슨 느낌인지 아니까. 그 그림을 봤을 때 네 표정도… ]
[ 삶은 항상 끝이 있잖아. 그걸 가장 잘 아는 건 켄, 그리고. ]
[ 말하지 말라고. ]
[ 나지. ]
감정에는 끝이 있을까? 평생을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사람을 보면, 불신이나 신뢰나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켄타는 또다시 직감했다. 누군가를 믿는 건 할 일이 아니라고. 애초에 마지막 전쟁 이후로 눈앞의 사람을 믿겠다고 다짐한 적도 없었건만. 믿음의 끝이 허망한 배신이라는 것을 느낀 뒤에는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을 버렸다. 그럼에도 첫 번째로 마음을 열기 위한 상대가 지그문트 블랙이라는 사실은 그가 남긴 흉터에 남아 있어서. 마음을 놓는 순간 그를 향해 나아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또, 이렇게 흘리다가 가장 무른 부위에 독을 흘리는 그를 마주하며 느끼는 건 배신감과 미묘한 허탈감이다.
켄타는 블랙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실도. 블랙의 죽음이라는 부분만 깔끔하게 도려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우스운 일이지. 마지막 전쟁 때 누구보다도 그의 죽음을 빌었던 것이 켄타였음에도. 막상 블랙이 죽음에 가까워진 순간과 그가 죽음을 입에 담는 것을 질색하다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끝끝내 뱉지 않았던 말을 꺼내 확인사살을 시키는 블랙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이렇게 부딪히는 순간을 영원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이라도 한 것 마냥.
뒤에 있는 켄타를 밀어준 건 블랙이다. 장기자랑을 하지 않고 빠지겠다면서, 온갖 묘수를 부리는 켄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제안한 것도 블랙이었다. 남과 가까워지는 것이 겁난 나머지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켄타에게 손을 뻗은 것도 블랙이었으며. 증오가 서린 주먹질을 내지를 때도 얌전히 맞아준 것이 블랙이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켄타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블랙과 켄타가 함께했던 모든 일은 어떻게 끝을 맺었는가. 눈앞에 훤히 드러난 결과를 다시 마주하기 싫어 어떻게든 시선을 돌렸건만.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건.
[ ‘ 삶은 죽음으로 끝이 나지만,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린다. ’ ]
[ …… ]
[ 무한한 건 없어. 아무리 거대한 그림도 액자라는 틀 안에 들어가고, 거대한 대양도 행성이라는 존재 하에 있는 거야. 자라나는 식물은 빛과 수분이 사라지는 순간 끝을 맞이하지. ]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
[ 너와 내가 유한한 삶을 산다 하더라도, 그 뒤가 완전히 마침표로 끝나진 않을 거라는 거. 한 번 정의된 관계가 영원하진 않을 거라는 것. ]
과거, 끔찍했던 과거는 수렁처럼 마녀를 감싸고 그 기억 속에서 살게 만드는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켄타는 고개를 들어 블랙을 바라보았다. 키가 크고 생기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 과거와 달랐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일정한 감정만큼은 여전하다. 이 사실을 외면하려고 했다. 마주하는 순간 뱉어낼 대답은 몇 년 전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전쟁이 끝난 직후, 살아난 블랙을 보면서 건넬 말을 적어두었으니까.
삶과 죽음은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서 지내는 방식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과거에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과거는 과거일 뿐, 바라보는 건 현재이자 미래의 서로일 테니까. 찬란하진 못하더라도 퍽 평범한 관계는 될 수 있을 거라고.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이 비치는 바다, 죽음의 바다와 비슷한 형상을 띄고 있는 파도는 무슨 색채로 반짝이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