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ue

21. 뭍과 물

collabo5450 2024. 6. 6. 14:32

 

 

  덜컹, 덜커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차는 출발한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간다. 손에 쥔 전시회 티켓에선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오랜만에 맡음에도 단 순간도 잊은 적 없는 향기였다. 연담淵潭에서부터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하여 바다로.

  당신이 있을 바다로, 네가 찾아올 바다로, 우리가 만났던 바다로….

 

  내딛는 걸음에 두려움이란 없고, 기다리는 시간에 불안함이란 없다. 이 모든 길이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걷기 위함이었다면, 지금 멀리 돌아가는 것 정도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 여정의 끝에 서로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 • • ❁⎈ • • •



  『친애하는, 나의 후회.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 그동안 잘 지냈을지 모르겠네. …그도 그럴게, 너무 오랜만이잖아. 얼굴 본 지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아.

  이제 날이 곧 풀린다지만 아직은 좀 쌀쌀한 것 같아. 당신이 있는 곳도 그래? 바다가 어는 일은 없다지만, 그렇다고 겨울바람이 차지 않은 건 아니잖아. 옷은 잘 챙겨 입었을까, 밥은 잘 챙겨 먹었을까. 이런 날일수록 몸을 더 잘 챙겨야 하는 건데. 날이 차니 아프기도 쉽잖아.

 

  새벽에 찬바람을 맞을 때면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곤 해.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도 이렇게 날이 추웠잖아. 유독 날이 추워서 그랬을까, 그때의 난 어쩌면 조금은 외로웠던 것도 같아. 전시회에 내 발로 찾아갈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안 하던 짓을 한 걸 보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이긴 하지만서도. …그야, 당신을 만났잖아.

  아마 이때부터 많은 게 달라진 것 같아. 가장 큰 변화는, 역시 바다를 좋아하게 된 점일까. 이젠 푸른 물결을 보면 당신이 가장 먼저 떠올라. 당신과 시선을 맞출 때면 보이는 짙은 푸른색이 꼭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거든. 그 외로도 좋아하게 된 파도가 속삭이는 소리, 비가 적잖이 쏟아지는 날. 전부 당신과 만나 생긴 일이었어. 당신 덕에 내 세상이 점점 넓어지는 것 같아.

  그것 말고도 꼽아보자면…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겠지.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꽤나 바쁘게 살아왔잖아. 앞만 보고 걸어가기에도 바빠 뒤를 돌아보긴커녕 주위를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으니까. 이제는 느긋이 걷는 법을 알아. 보폭을 맞춰 걷는 배려도,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다정함도. 전부 당신에게서 배운 것들이니까. 그러니 이건 당신이 내게 가져다준 여유이자 안정일 거야.

 

  그래서 요즘은 집에 있는 물건들을 보면서 당신과 보냈던 나날들을 떠올리곤 해. 당신과 쌓은 추억이 이렇게나 많아. 당신을 만난 겨울로부터 봄, 여름, 가을까지 당신이 없는 순간이 이제 존재하질 않더라고. 이젠 그 어떤 계절이 와도 당신을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기꺼운 것 같아. 참 신기하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당신이 책임져야 해. …사실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 내 바로 옆엔 고양이 인형이 있어. 아직도 볼을 쿡 누르면 폭신폭신해. 이제는 아주 새것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낡지도 않았어. 아침마다 두고두고 보니까 계속 관리를 하게 되는 것 같아.

  잠들기 전, 인형을 안고 있으면 당신과 똑닮은 인형을 안고 있던 당신이 떠오르곤 해. 그러고 보면 이 인형, 크루즈에서 탔었지? 그 안에 게임장에서 탔던 게 기억이 나. 당신 닮은 인형을 뽑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도 기억나고. 결국 서로 각자 닮은 인형을 하나씩 안고 다녔지. 그렇게 운이 없는 편도 아닌데, 슬롯 머신을 고장 냈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결국 당신만 챙겨서 도망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미안한가? 싶기도 하고.

  그 전날, 잠시 바다를 같이 걸었던 것도 기억나네. 아직은 추웠던 겨울날이라서 발만 살짝 담갔었지. 그게 아쉬워서 여름에 다시 오자고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렇게 됐지? 비록 거기와는 다른 바다이긴 했지만.

 

  말 나온 김에 떠올려보자면, 정말이지 잊지 못할 생일이었어. 반쯤 농담 삼아 당신을 달라고 했더니 시간 있냐고 물어보던 게 아직도 기억이나. 조금 들떠서 모처럼 흰색 원피스를 꺼내 입었더니 만나자마자 본 당신의 표정이 묘했던 것도. 이제 와 변명을 하자면, 내가 타본 배는 전부 크루즈 같은 여행선이었거든. 배 위가… 그렇게까지 험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어. 그나마 뱃멀미는 안 하는 체질이어서 다행이었지. 하지만 배가 정말 사정없이 흔들렸고 결국 얌전히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어서 조금 아쉬웠어.

  그래도… 불러서 나와 봤을 때 본 순간이 좋았으니까. 물방울이 튀고 거기에 햇살이 부서져서 반사되는데 주위가 온통 반짝였어. 그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나. 왜 당신이 매번 배를 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

  정말로, 난 당신이 그렇게 크게 웃는 건 그때 처음 봤거든. 물에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기다 눈을 마주치니까 또 웃었잖아. 그때, 따라오길 잘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어.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도.

 

  …정말 참 좋았는데. 이렇게 곱씹다 보니 계절이 돌아 어느덧 다시 당신을 처음 만났던 겨울의 끝자락이야. 꽃이 싹을 트기 전엔 볼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 추위도 꽃이 시샘한 것이라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냥… 당신이 아주 많이 보고 싶어. 아주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걷고 싶어. 그러니… 조만간 만나러 갈게. 다시 만나면 반겨줄래? 이 추위가 가시기 전에 다시 볼 수 있길 바라.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는, 메시아 헤로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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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내 오랜 다정아. 부쩍 날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홀로 보내는 겨울이 많이 시리지는 않습니까? 제아무리 금방 봄이 찾아온다고 한들 눈이 녹고 꽃이 피기 직전이 가장 쌀쌀하다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꼭 그러했지요. 매섭던 바람이 한 풀 꺾여 곧 새싹이 하나둘 틔워질 시기 말입니다. 나는 이맘때쯤이면 유독 네 생각이 짙게도 납니다.

 

  너도 마찬가지입니까? 너도, 이따금씩 내 생각을 합니까? 우리는 추운 겨울날 고향으로 가던 열차에서 만났지요. 그때의 난 상실을 겪은지 얼마 채 지나지 않았고, 우울감에 젖어 다시는 그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다짐도 네 앞에서는 소용이 없더군요. 나는 언젠가 다시 만남을 알기에 더 이상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건, 너로 하여금 빚어진 확신이라 할 수 있겠군요. 내 모든 판단에 네가 얽혔다는 사실이 어쩐지 기껍기만 합니다. 내가 너를 떠올리고 있다면 그게 언제 어디서든 너와 함께하고 있다는 뜻이 되니까요….

  나는 네게서 그리워하는 대신에 기약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같이 맞이하는 내일이라는 건 상상만으로도 근사하더군요. 그렇게 하루, 또 하루, 또다시 하루… 매일이 반복되다 결국에는 사계를 온전히 너와 보내게 되었습니다. 너는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죠. 나는 여름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나에게 있어 여름이란, 이다지도 아름답지만 그만큼 끔찍한 계절이었거든요. 때로는, 기억에 파묻혀 태양이 얼마나 밝은지 잊고 살게 되더군요. 걱정은 말아요. 전부 옛말입니다. 이제 나는 햇빛이 얼마나 따사로운지 압니다. 녹빛으로 잔뜩 우거진 초목도, 눈이 아릴 정도로 훤한 윤슬도, 세상에 얼마나 사랑스러운 게 많은지도.

  우리가 바다에서 만났기 때문인지 그 어느 곳보다도 바다를 더 열심히 찾았던 것 같아요. 새벽노을로 시작해서, 저녁노을로 끝마치는 나날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있잖아요, 메시아. 네 눈동자는 마치 노을과 같은 색이라, 가만히 마주 보고 있으면 당시의 풍경을 재현하는 것만 같습니다.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달빛이 습윤한 공기에 반사되어 너는 마치 등대처럼 빛납니다. 그러다 다시 새벽녘이 밝아오면, 문득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머릿결이 이슬을 머금은 수선화처럼 살랑입니다.

  그 모습을 네게 직접 보여주고 싶어요.

  내 시선의 끝을 한 장씩 담아 사진으로 걸어뒀습니다. 준비가 길었습니다. 오래간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여전히 있습니다. 언제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어느 때곤 너를 맞이할 수 있도록. 다시 만날 적에는 곧 봄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의 첫눈이 내릴 어느 겨울날에.

내 오랜 벗 메시아에게, 너의 작은 후회가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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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은 언젠가 끝이 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그 끝에서 종종 새로운 시작을 찾아내곤 했다. 인생은 길고 긴 여정길이며, 그 의의란 지난한 여정에 지치지 않도록 함께 걸을 동반자를 찾는 것에 있는 게 아닐까.

ㅤ그리하여 우리는 끝과 끝에서 걸어온 마침내 서로를 맞이하게 된다.

 

  해안선이 그려내는 뭍과 물이 서로를 침범하고, 흔적을 남기어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내게 당신이 깃들어 있음을, 동시에 당신에게 내가 새겨졌음을 이제 우리는 안다. 서로를 애틋이 그리며 손가락과 손가락을 얽어매고, 우리를 가르는 경계선 위에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노을을 맞으며 황혼이 여물도록 머나먼 길을 나란히 걸어가는 것.

ㅤ그 걸음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

 

 

  “그럼, 같이 걸을까.”

  “오래 걸어요. 동이 틀 때까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면, 당연하다는 듯이 맞잡아온다.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지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생각한 삶의 정의였다.

 

 

  쏴아아― 밀려드는 파도 소리와, 이를 장작 삼아 붉게 타오르는 노을. 파랑 위로 적색이 짙게 드리운다. 이 열기가 한바탕 식는대도 그리 춥지는 않을 테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한.

해안선을 따라 긴 발자국 두 줄이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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