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미시감 未視感
명사 1. 심리 기억 오류의 하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보는 것으로 느낀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분명 처음 겪는 상황이고 처음 보는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감정을 느낀다거나, 정반대로 자주 겪는 상황임에도 처음 보는 것 같다는 감정을 느끼는 경우 말이다. 명경은 대체로 둘 다 자주 경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제 얼굴이 낯설다고 느끼는 게 몹시 낯설었다.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런 표정이 아니라, 다른 표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심코 손을 뻗어 거울 위를 어루만졌다가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손끝에 닿는 피부의 감촉마저 낯설었다.
그래, 낯설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저를 뒤에서 끌어안는 그의 체온이며 체향은 전혀 낯설지 않아서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살짝 튼다. 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심각하네. 다정한 얼굴.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얼굴. 거울로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묘하게 창백한 듯한 제 뺨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내리고 엄지로 눈가를 쓸어보는 그의 행동 모두가 사랑스럽고, 또 집어삼키고 싶을 만큼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 몸을 움찔한다. 제 소유욕이야 이미 스스로 심각하다 느낄 정도이긴 했지만 이렇게 날 것의 소유욕이 고개를 들이민 적은 없었다. 그가 제 소유욕을 기껍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이 순간 그걸 말하는 건 그다지 좋은 대화법이 아닌 듯해서 그저 고개를 절레 젓고 인터뷰할 생각에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얼버무리며 다정한 입맞춤을 돌려준다. 새삼스럽게 몇 번이고 한 인터뷰가 긴장할 게 뭐 있다고. 그래도 그는 내 변명을 믿어주고, 차가워진 손끝을 주물러준다. 데려다줄게요. 긴장한 것 같으니까 내가 모셔야지. 장난스레 이어지는 말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엄청 귀한 에스코트 받겠네요. 기대할게요.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면 굉장히 낯설어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싫어할 때도 있고, 오히려 반가워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언제나 내향적이고 소심하다고 생각했으나 낯선 환경에서 의외로 적극적이며 외향적인 모습을 발견하면 꽤 좋은 일이 아닌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다정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속하자 ‘나’는 금세 남들을 공격하며, 내 손바닥 안에 두고 싶어 하고,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 모습을 반갑게 여길까, 꺼리게 될까. 여기서 또 사람들의 유형이 나눠지겠지.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모습 하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걸 자신이 알고 있던 아니던 사람은 다양한 것들이 모여 구성되는 존재다.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입체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당장에 주변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내게는 너무나도 증오스럽고 짜증나는 인간이지만 내 친구에게는 참으로 친절하고 좋은 사람일 수도 있는 경우.
왜 인간은 어떤 한 모습에만 집착할까? 왜 그렇게 먼 길을 돌아가는 걸까? 다시 생각하면 쉽지 않은가. 그저 그 전부가 그 사람인 건데. 그 전부가 나인 건데. 어느 것 하나 뚝 잘라 생각할 수 없는데.
그러니까 이 장황한 생각을 하게 된 건, 나의 다른 면모를 사랑하지 않고 배척하던 이가 갑작스레 생각난 탓이다. 아. 사람이 못쓰게 됐네. 정말 한참 지난 과거를 생각하고. 이제 제겐 어떤 의미도 없는 사람인데. 혀끝이 썼다.
“경아.”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을 감싸쥐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며 쳐다본다. 그가 싫어할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괜히 저 혼자 찔렸다. 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겠지만, 저 푸른 눈은 가끔 제 속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말할 때가 있어서. 그래서 그저 네, 하고 답하며 그의 손을 마주 잡는다. 빨간불이 선명했다.
한참 마주 본다. 초록 불이 반짝거렸다. 성질 급한 어떤 운전자가 클락션을 울리기 전에 그가 장난스레 입꼬리를 휙 올리고 사랑해, 하고 속삭이더니 다시 차를 출발한다. 마주 잡은 손은 여전했다. 불안할 정도로 크게 들리던 심장 소리가 이제는 조금 설렌다.
어떤 사실을 깨닫는다. 이 사람은 나의 다른 면모를, 어느 것 하나 빼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2
“벌써 인터뷰도 반이나 했네요.”
“세상에. 반밖에 안 남았어요? 아쉽네요.”
하하, 작가님도 참. 아까부터 시계 보시던 거 다 압니다. 한쪽 눈을 장난스레 찡긋하며 농담하는 상대방에 태연하게 맞농담으로 대꾸한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니까 믿을 수가 없어서 본 거죠. 머그컵을 감싸쥐고 문지른다. 아까는 따뜻했는데 지금은 다소 미지근했다.
“작가님한테는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겠네요. 작가님 드라마에 나오는 주요 캐릭터들은 유난히 선악 구분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이 많죠. 작가님을 일약 스타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범람>의 ‘기무영’, <타오르는 별이 되어>의 ‘태성요’가 대표적인 인물인데요. 악역이라는 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착하지 않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간극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들죠.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합리화하지 않으면서 그런 애정을 받게 하는 거,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어떤 이유가 있으실까요? 어느 쪽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작품마다 늘 배치를 하시는 거요. 조금 전까지 농담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던 상대방은 곧장 진지하게 질문을 이어간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말을 어떻게 정제해 꺼내야 할지는 모르겠어서 잠시 속으로 차분히 고른다.
인간의 선악, 그리고 다양한 모습에 대한 건 그를 만나기 전에도 늘 고민했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에게서 답을 얻은 고민이기도 했다.
고민의 근원을 따라가면 어렸을 때의 ‘나’로 돌아간다. 누구나 어떤 역할을 기대받는다. 그게 나의 경우에는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반듯한 아들’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자녀가 그런 역할을 부여받았을 테다. 그게 제게는 조금 더 강박적으로 다가왔을 뿐이지.
사람은 참 이상하다. 어떤 틀을 가져다 대면 그 틀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한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참으려고 노력하거나 노력하지 않거나 결과적으로 어떻게든 그 틀 그대로 빚어지지는 않는다.
결과만 말하자면 난 어머니의 기대만큼 자라진 않았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기까지 지나온 시간에서 참 치열하게도 고민했다. 모자람 없는 인간이 가능한가. 착하게만 자랄 수 있는 걸까? 누구나 인정할 만한 반듯한 사람으로 자란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지킬 박사’처럼 사회에서 인정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고, 선량한 모습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가? 그런데 왜 그렇게 자라야 하나? 아아, 물론 간단하게 생각하면 답은 바로 나오겠지. 하이드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럭저럭 착하게 자란 거다. 다만 명경은 태생이 깊고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서 간단하게 결론내릴 수 없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랬다. 그린 듯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슬며시 기울인다.
“모두가 한 번쯤 이 선택을 했으면 이렇게 살았을 텐데, 하는 고민을 했을 거예요. 기자님도 그러실 거고요. 물론 저도 그렇죠. 하지만 제가 만든 ‘기무영’과 ‘태성요’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어요. 그저 하고 싶은 걸 했을 뿐이에요. 그게 악한 행위든, 선한 행위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어떻게 보던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인간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으니까요, 덧붙인다. 이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래, 제게 있어서는 나름대로 답이었다.
3
세상은 온통 회색이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천국에 가는 사람은 아주 적고—사실상 없고— 지옥에 간는 사람만 차고 넘친다고 했다.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졌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람을 평가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는 걸 의미할 것이다. 선행을 하려고 했던 일이 거슬러 올라가면 근본적으로 악행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원체 많으니.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있을까. 사람도 온통 회색이다. 당연하지만 악인을 합리화하는 말이 아니다. 또한 선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명경은, 사람을 어떤 한 가지 모습으로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자신의 어떤 흉폭하고 반사회적인 면을 분리해서 자기는 깨끗하게만 있고 싶었던 지킬 박사를 보아라. 결국 파멸이지 않았나. 하이드는 결국 지킬이고, 지킬은 결국 하이드이므로. 어느 한 존재만 살 수는 없고 어느 한 존재만 죽을 수는 없다. 분리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어도 실패한 거다. 끊임없이 고민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돌아와 보면 명경도 그렇고, 백선우도 그렇다. 명경은 백선우가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이서준’의 모습까지 사랑하고 있으니까 백선우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아아, 그래. 그를 만난 이후로 기억에 남는 날은 너무나도 많아 책을 열두 권 쓰고도 남지만, 특별한 순간은 분명히 존재함이라. 그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이서준’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날이다. 그가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인 걸 알고 있다. 그런 모습에 반하기도 했다. 다만 그 모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동시에 그 모습을 꺼내 반질반질 다듬어 대중들에게 보이고 싶기도 했다. 아, 참으로 기묘한 욕망이다. 그를 소유하고 싶은 동시에 그를 보여주고 싶다니. 그저 한 사람일 뿐인 ‘명경’과 ‘작가’ 명경이 동시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일까. 하여튼 극장에서 보았을 때의 벼락같은 충격 아닌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왜 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나, 이 사람은….
그를 나눠서 보고 싶지 않다.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싶다. 사랑하고 있다. 한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최악의 모습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 이 마음의 시작은 분명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한 그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지. 다정한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고. 그의 어떤 다른 면모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미시감. 익숙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감상이 들었을 때. 그러나 그게 과연 그에게만 있는가? 나에게도 있는 모습이다. 나눠서 봐야 하는가? 결국 그가 보이는 모든 모습이 백선우 그 자체인데. 내가 보이는 모든 모습이 명경 그 자체인 것처럼.
그러니 우리 모두 지킬이기도 하고 하이드이기도 하다.
4
“인터뷰는 잘 끝냈어?”
“응. 잘 끝냈어요.”
차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공기가 저를 감싼다. 체온이 높은 그에게는 다소 덥겠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곧장 그를 쳐다보니 외투는 어디로 갔는지 얇은 긴소매 차림인 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응? 왜?”
“더우면 히터 잠깐 꺼도 되는데.”
“경이 씨가 추위 많이 타는데 미리 따뜻하게 해야죠. 외투야 벗어두면 그만이고.”
카페에서 히터 안 틀어줬어요? 왜 손이 차가운 거 같지. 그의 두 손에 잡혀서 주물러지는 제 손을 보는 건 볼 때마다 새롭다. 제 손도 제법 남자답게 길쭉하고 크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보다 그의 손이 따뜻해서 그런 것 아닌가. 흐흥, 가볍게 코를 울리며 웃고는 뜨뜻한 가죽시트 위로 몸을 한껏 파묻는다.
“극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음, 근처에서 밥 먹고 들어가면 딱 맞을 정도의 시간이 남았지.”
“그럼 천천히 갈까요? 일했더니 얼른 데이트하고 싶어졌어.”
그럴까? 빙긋 미소를 덧그리며 제 손을 한참 더 만지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놓아주고 부드럽게 운전을 시작하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이 방향의 얼굴은 조금 더 날카로운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해. 그런 생각을 하며 인터뷰 내용을 복기한다. 그때의 내 생각들도 같이.
동시에 문득 생각한다. 지킬 박사도, 하이드도, 사실 그 둘을 모두 품어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그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다른 누군가가 그를 사랑했어도 파멸이라는 결과만이 나왔을까? 이미 완결이 난 지 한참 된 소설이라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기엔 다소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고 있는 지금이라서,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그가 있어서.
“선우 씨.”
“응?”
세상은 온통 회색이라서, 내 앞에 있는 당신도 회색이겠지만 나를 보는 두 눈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푸른빛이라서. 그 눈이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든지 간에 나를 담고 사랑을 고백하는 건 여전하니까.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지킬이든 하이드든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언제부턴가 내게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선택권이 없었기에.
“으응, 너무 사랑한다구.”
“나도. 나도 너무 사랑해, 경아.”
“왜 갑자기 이런 말 하는지는 안 물어봐요?”
“물어봐야 해? 네가 날 사랑하는 거, 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건데.”
“아아, 정말. 이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해.”
나도, 그리고 또 다른 ‘나’도 당신을 사랑해. 그렇게 사랑을 되뇌며 눈을 느릿하게 끔뻑이다 감는다. 오로지 우리 둘만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다른 이는 상관없으니…. 아, 기이한 만족감이 차오른다. 기쁘다. 환희의 함성과 사랑의 열락이 가슴에서부터 손끝까지 빼곡하게 파고든다. 사랑, 사랑, 사랑. 내가 오롯이 나로서, 그가 오롯이 그로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맹목적인 감정.
오늘도 영원 같은 하루가 오로지 서로로 채워진다. 그 끝에 파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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